Key Points
- 미 이민 2세 사회학자 그레이 조 교수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 한국출간
- '한국전쟁·기지촌·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조현병' 속 어머니의 굴곡진 생애 고백
- 엄마의 음식에 대한 회고록이자 조현병의 사회학적 발생원인 연구한 사회학저서
- "엄마는 양공주(yanggongju)였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나한테는 영웅이니까"
6·25 전쟁, 가족 상실, 굶주림,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사회적 죽음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담은 회고록 '전쟁 같은 맛'이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됐습니다.
미 이민 2세대 사회·인류학자 그레이 조 교수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은 6.25 가 빚은 기지촌 혼혈아 출산이라는 낙인과 함께 한국을 떠나야 했고, 미국 이민 이후 이주여성의 고달픈 삶을 살다 끝내 조현병 환우로서 굴곡진 생애를 마감한 엄마에 대한 복기록이자 연구이기도 합니다.
'전쟁 같은 맛'은 어떤 내용을 담은 책인지 자세히 알아봅니다. 컬처 IN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 합니다.
박성일 PD (이하 진행자):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이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큰 호평을 받은 책이라고요?
유화정 PD: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은 2021년 시사주간지 타임과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습니다. 같은 해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2년에는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수상했습니다.
'전쟁 같은 맛'은 사회학자인 한인 2세 딸이 어머니의 정신분열증의 발생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음식과 가족사를 탐구하는 내용으로, 엄마에 대한 기록이자 한국 전쟁 이후 기지촌 생활을 했던 이민 1세대에게 씌워진 사회적 죽음을 고찰한 탐구이기도 합니다.
미 전문 서평지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s)는 어머니의 정신분열증의 원인을 캐면서 저자 자신의 가족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얼룩진 생존자와 후세대의 가족사를 풀어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통렬한 여정으로 안내하는 파워풀한 작품이라고 호평했습니다.
진행자: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담은 회고록으로도 소개됐는데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조 교수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면 이해가 쉬울 것 같은데요.
유화정 PD: 그레이스의 어머니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6.25 전쟁을 겪으며 오빠와 아버지 등 가족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다 미 해병대 출신 상선 선원이던 백인 남자를 만난 군자는 1971년 혼혈아 그레이스를 낳았는데, 외국인과 살을 섞었다며 가족에게 조차 외면당했고, 타락한 여자라는 낙인 속에 추방되다시피 미국 워싱턴주의 시골 마을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언어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냉전 시기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곳도 안정된 피난처가 되진 못했습니다.
진행자: 종전 후 살아남기 위해 미국인 상선 선원을 만나 미국에 정착했지만 전후 한인 이주여성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짐작만으로도 쉽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네요.
저자 그레이스 M. 조가 유년기를 보낸 미국 워싱턴주 셔헤일리스 집. 조의 어머니 군자는 이곳 숲에서 고사리 같은 나물이나 블랙베리를 채집했다. 글항아리 제공
밤에는 소년원에서 일하고 낮에는 숲과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해다 팔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어쩌다 이주해 오는 한인 입양아와 이주여성이 있으면 직접 김치를 담가 먹이기도 할 만큼 살뜰히 돌봤습니다.
진행자: 지난해 Apple TV 드라마로 세계적인 화제몰이를 했던 '파친코'가 있죠.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나 억척스럽게 생존해야 했던 한인 이민 가족 4대의 삶과 꿈을 대하스토리로 엮은 재미 동포 이민진 작가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두 작품 모두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뤘지만 '전쟁 같은 맛' 은 픽션이 아닌 실화 회고록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을 텐데요.
유화정 PD: 저자의 나이 15살 무렵,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카리스마가 넘쳤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 문을 닫고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집안에 틀어박혀 TV 속에서 이상한 암호를 찾는 데 골몰했고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습니다.
모든 것을 바꿔버린 엄마의 사회적 죽음은 조현병으로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과거 기지촌에서 매춘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나날이 무너져 가는 엄마와 그 주 변을 떠도는 소문들에 참기 어려웠던 딸은 트라우마를 안고 브라운 대에 입학해 엄마 '군자'로 대표되는 전후 한인 이주여성의 기구한 삶의 궤적과 지독한 조현병의 뿌리를 캐기 위해 몰두했습니다. 그 오랜 탐구 끝 결과물이 2008년 박사 학위 논문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몰: 수치심, 비밀, 그리고 잊힌 전쟁'입니다.
진행자: 책을 쓴 그레이스 조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인류학자로 소개됐는데 모친의 조현병 발병을 경험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존재와 생애가 개인적·학문적 인생의 중대 지표가 됐네요.
유화정 PD: 그레이스 조는 브라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뉴욕시립대에서 사회학과 여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뉴욕시립대에서 사회학과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008년 갑작스레 찾아온 엄마의 물리적 죽음 이후 그레이스 교수는 6·25 전쟁, 가족 상실,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은 어머니 군자를 연구 대상으로 사회적 탐구서 '전쟁 같은 맛'을 펴내기에 이릅니다.
"엄마의 인생을 담은 '전쟁 같은 맛'은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이야기"라며 "돌아갈 곳이 없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글쓰기로 되살리고 싶었다."고 그레이스 교수는 전했습니다.
저자 그레이스 M. 조 글항아리 제공 Credit: Patrick Bower
유화정 PD: 저자는 책에서 내게는 세 엄마가 있었다고 썼는데, 유년기의 엄마는 요리를 좋아했고, 활기찼고 이상적인 엄마에 가까웠으며 낯선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엄마입니다.
두 번째 엄마는 조현병으로 아프고 아무것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 저자는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엄마는 나를 당신의 요리사로 받아들이고,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한국 음식을 내게 가르쳐주며 되살아난 엄마입니다.
엄마와의 마지막 10여 년간 같이 밥을 먹으며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빵 부스러기처럼 흘려주시곤 했는데, 연구를 시작하도록 추동한 사람은 두 번째 엄마였지만 그것을 끝마치도록 자양분을 준 사람은 세 번째 엄마였습니다.
의 그레이스 M 조는 미군기지 클럽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본다. 사진은 경기도 송탄의 기지촌. 글항아리 제공
유화정 PD: 콩국수, 생태찌개, 생선조림, 쇠고기 뭇국 등입니다. 저자의 어린 시절과 연결된 음식으로는 미역국, 비빔밥 등을 꼽았는데, 특히 아침에 미역국 냄새가 나면 금세 일어나서 밥을 먹고 제시간에 등교했을 정도로 미역국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자 자신의 최애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엄마 군자는 딸이 클 때 부엌엔 얼씬도 못하게 했는데, 한 번은 나중에 요리사가 되고 싶다 했더니 "안 돼! 열심히 공부해서 제일 좋은 대학 가야지. 넌 의사, 변호사, 교수도 될 수 있어!"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또 엄마는 종종 딸에게 그레이스라는 이름대신 '순희'라 부르곤 했는데, 순희는 '가장 순진한 소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레이스 교수는 이에 대해 "엄마가 내 순진함을 그토록 바란 이유는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진행자: 딸의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었던 거죠. 제목은 왜 ‘전쟁 같은 맛’인가요?
유화정 PD: 말년에 어머니는 식욕을 잃고 음식을 거부하셨는데,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 분유를 드리자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라고 하셨답니다. 실제 전후 미국이 식량 원조로 준 분유를 먹고 유당 불내증으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는 조사 기록이 있습니다.
저자 그레이스는 전쟁 같은 맛은 잊고 싶은 시절의 고통을 불러내는 맛이겠다 싶어 듣는 순간 책 제목이 되겠구나 직감했고, 나아가 과거에 끝난 전쟁이 아니라 현재에도 무엇과 연결돼서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 A memoir)'을 제목으로 썼습니다.
Credit: Feminist Press
유화정 PD: 6·25 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술이나 성을 파는 서비스업에 종사한 한국 여성은 약 100만 명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10만여 명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정부가 사실상 기지촌을 운영했고, 혼혈아가 태어나면 해외 입양을 권장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레이스 교수는 대법 판결에 "한국 사회가 이 여성들을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보상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진행자: 끝으로 '전쟁 같은 맛'은 목소리를 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유화정 PD: 책 말미에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준비 중인 책에 양공주(yanggongju)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딸이 말하자 "오, 그건 나쁜 말이야."라고 엄마 군자가 지적합니다.
그러자 딸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가 글쓰기로 그 의미를 바꾸려고 해요. 그 단어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었으면 해. 그 여자, 내게는 영웅이니까. 나는 엄마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라고 맺음합니다.
진행자: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지형을 담은 '전쟁 같은 맛' 컬처 IN에서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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