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 특집: 한국계 쌍둥이 뮤지션 Jayesslee의 ‘엄마 없는 어머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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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유튜버 뮤지션 Jayesslee로 활동하고 있는 호주의 한국계 쌍둥이 자매 재미스와 쇼냐 님은 15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Source: SBS / Korean program

Jayesslee로 활동하는 한국계 쌍둥이 자매 재니스와 소냐는 15살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이제 각각 두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두 자매는 아직도 엄마 없는 첫 어머니의 날을 잊지 못한다.


Key Points
  • 215만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지닌 호주의 한국계 쌍둥이 자매 뮤지션 Jayesslee
  • Jayesslee의 재니스와 쇼냐, 6년간의 동면을 깬 첫 인터뷰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공유
  • 15살에 어머니를 잃고, 이제 어머니가 된 자매, 과거의 기억을 돼 짚으며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움…
나혜인 PD: Jayesslee, SBS 한국어 프로그램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재니스와 소냐 님 함께 나오셨는데요. 호주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인 동포 쌍둥이 자매이고요. 어쿠스틱 듀오인데요. 지난 15년 동안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며 현재 215만 명이 Jayesslee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 스튜디오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냐 님: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니스 님: 이 자리에 있게 돼 기쁩니다.

나혜인 PD: 아무래도 소셜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그분들을 위해서 먼저 직접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냐 님: 저희는 시드니에서 태어나고 자란 37살의 쌍둥이 자매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한국인이시고, 저희는 18살 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재미로 유튜브에 동영상을 업로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중 하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고요. 그렇게 저희의 음악 커리어가 시작됐습니다. 이제 저희 둘 다 각각 아들 2명씩을 두고 있습니다. 저희는 엄마고 뮤지션이고 사실상 6년 동안 동면 상태에 있었습니다. 과거의 경험을 치유하는 데 시간을 좀 들였는데요. 지금이 사실 저희가 나와서 저희의 경험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첫 시간입니다. 그래서 매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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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한국어 프로그램 스튜디오를 방문한 Jayesslee 소냐(왼쪽)와 재니스(오른쪽) 님. Source: SBS
나혜인 PD: 6년 동안 동면을 하셨다고요? 그럼 6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재니스 님: 삶은 저희를 어떤 여정으로 이끌었어요. 저희는 15살 때 엄마를 잃었어요. 음악에 대한 새로운 문이 열렸고,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고, 엄마가 됐고,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잠깐 보류했었어야 했습니다. 엄마이자 뮤지션으로 저희를 다시 발견하는데 집중하기 위해서였죠. 이제 저희는 그 어느 때보다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고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을 시기가 됐습니다.

나혜인 PD: 와. 이런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또 Jayesslee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기대가 되는데요. Jayesslee의 유튜브는 2008년에 시작됐습니다. 벌써 15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콘텐츠를 만들어 왔는데요. 그동안 Jayesslee의 음악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궁금합니다.

소냐 님: 저희는 22살 때부터 커버 곡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남자 친구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게 대부분이었어요. 스스로에 대해서 발견할 때 사실 저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몰랐어요. 다만 음악이 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준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더 많은 경험을 저희가 할수록, 더 많은 고통을 겪을수록,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수록 음악을 통해 반대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아직 음악으로 보여드리지 못한 정말 너무 많은 경험을 했어요. 지금 저희는 저희의 진짜 소리를 찾는 진화 과정에 있는 것 같은데요. 뭔가 우리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죠. 감정과 경험이 충만해 한 소절, 한 음절, 한 소리라도 더 실제같이, 진짜같이 느낄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가는 작업을 하고 있고요. 매우 신이 납니다. 새로운 것이겠고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여정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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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Jayesslee 콘서트 Source: Supplied / Jayesslee

나혜인 PD: 네. Jayesslee의 새로운 여정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는 소냐와 재니스 님과 어머니의 날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데요. 먼저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노래부터 잠깐 듣고 갈까요?

나혜인 PD: 네. 어머니의 날과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인데요. 어떤 곡이죠?

재니스 님: 네. 어머님께에요.
나혜인 PD: 어머니님께 지오디의?

재니스 님: 네.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인데요. 모든 슬픔과 후회, 고통을 포용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계속 나아가는 것... 이런 것들이 너무 진실되고 실제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오늘 이 곡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혜인 PD: 네. 완벽한 곡을 준비해 주셨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날에 대한 얘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앞서서 언급해 주셨지만 호주의 한국 가정에서 자라셨죠. 그리고 15살에 어머니를 잃은 두 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공유해 오신 바 있는데요. 어머니가 없이 어머니의 날을 보내는 것은 어떤 심정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재니스 님: 엄마가 없는 어머니의 날은 매우 매우 매우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경험이죠.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아픕니다.

나혜인 PD: 혹시 엄마없이 보낸 첫 어머니의 날을 기억하시나요?

재니스 님: 네. 소냐와 엄마 없이 보낸 첫 어머니의 날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때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 정말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어요. 너무 생경한 경험이라 저희는 이 슬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여전히 배우고 있던 때였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슬픔에 대비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 슬픔을 경험하지는 못했던 거죠. 저희는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울지를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저희를 너무 가엽게 여기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는 그 누구도 저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저희는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 와서 같이 울었어요. 그냥 울고, 울고 엄마를 부르고, 대답이 없으면 느끼게 하는 거죠. 그 첫 어머니의 날을 기억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실제로 해가 지날수록 나아졌습니다.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추모의 날로 바뀌고 좋은 일을 기억하고 후회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주게 됩니다. 삶은 짧고 하루를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어머니와 같이 가까운 사람을 잃은 후에는 다른 사람을 더 잘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저희가 경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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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와 소냐 자매의 어린시절 사진 Source: Supplied / Jayesslee
나혜인 PD: 어머니와 어떤 좋은 추억이 있으세요?

소냐 님: 엄마가 암 진단을 받기 전, 우리의 어린 시절 기억을 보면 엄마는 항상 허둥지둥하고 서둘렀어요. 성격이 급했기 때문에 늘 좌절을 느낄 때면 저희에게 “이 기집애들”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죠.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요. 언젠가는 엄마에게 왜 우리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렇게 부르냐고 묻기도 했었어요. 왜냐면 우리 이름보다도 기집애들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고요. 그런데 저희는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봤어요. 엄마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엄마는 뭔가가 바뀌었는데요. 나중에 저희가 엄마가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엄마가 직접 보여주셨고, 그것은 가장 강력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 새겨졌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는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은 기분이라고 말했어요. “우리 피자 먹으러 가자, 본다이로” 그렇게 말씀하셨죠. 저희는 그렇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요. 나가서 외식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것은 또 하루를 낭비하지 않을 것이고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것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엄마의 말을 실제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죠. 그래서 저희는 정말 본다이에 갔어요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시켰고 테이블 2개를 붙여야 될 정도가 됐죠. 이건 제가 가진 엄마와의 가장 재미있는 추억이고요. 엄마가 떠나시기 전에 이런 시간을 마련해 보여주셨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나혜인 PD: 재니스 님은 어떠세요?

재니스 님: 나중에야 이해한 게 있어요. 어느 날 엄마가 저희를 장난감 가게에 데려가 곰인형을 하나씩 사주셨죠. 저희는 너무 신이 났고 완벽한 하나를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소냐가 하나를 고르고 제가 하나를 골랐죠. 그러고 가게에서 나왔는데 엄마가 갑자기 멈춰 서서 다시 가게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곰인형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아름답다고…그런데 가격을 보니 너무 비싸서 너네들이 이걸 고를까 봐 숨겨뒀다고요. 하지만 이걸 당장 바로잡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가서 그 인형을 봤어요. 하지만 저희 둘 다 그 인형을 원하지 않았어요. 제가 나이가 들고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가 그렇게 한 것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엄마는 아마도 어떻게 실수를 하고 어떻게 바로잡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줬던 거예요. 그리고 잘못한 행동을 인정하고, 정직해지는지를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걸 우리 아이들에게 가리키고 있어요. 이제 와서 그때의 엄마에게 감사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배움에 대해 감사해요. 저희는 계속 배우고 있고 지금 저희가 엄마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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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재니스와 소냐 그리고 어머니 Source: Supplied / Jayesslee
나혜인 PD: 그럼 어머니는 딸들과 같이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 보네요.

재니스 님: 네. 2년이 남았다고 했는데 엄마는 7년을 더 사셨어요. 저희를 위해 7년 동안 싸우셔서 수명이 연장된 거죠. 매일이 기적 같았어요. 하지만 어떤 날들은 기적처럼 느끼지 않고 감사하지 못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죄책감을 느꼈죠. 아픈 부모님과 살 때에는 죄책감이 따라와요. 트라우마 같은 거죠. 트라우마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것이 저희의 일이에요. 이런 모든 일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혜인 PD: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동반될 겁니다. 어머니가 떠나고 나신 뒤 어떤 것들이 가장 힘들었나요?

소냐 님: 엄마가 떠나신 뒤 저희는 사춘기의 정점에 있었어요.

나혜인 PD: 사실 너무 좋지 않은 타이밍이네요.

소냐 님: 네. 집은 엉망 진찬이었어요. 집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그 누구도 몰랐죠.

나혜인 PD: 언니가 있으세요? 아니면 두 분뿐이신 가요?

소니아 님: 네. 저희 둘 그리고 아빠뿐이었어요. 그냥 너무 벅차서 설거지나 빨래 같은 작은 일들도 너무 힘들게 느껴졌어요.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조차 힘들었죠. 왜냐면 엄마가 여기 없기 때문에라고 느끼니 더 힘든 거였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우울증에 빠졌던 것 같아요. 섭식장애를 겪었고, 학교에서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많은 것들이 충격을 줬어요. 모든 것들이요. 저희 고통스러웠는데, 저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리고 저희가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저희 아빠가 아주 한국적인 아빠라는 것이었어요. 말을 매우 최소한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시고요. 그러니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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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와 소냐, 아버지와 아이들 Source: Supplied / Jayesslee
나혜인 PD: 그럼 엄마가 늘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 오셨겠어요?

소냐 님: 네. 그게 저희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이었어요. 엄마가 여기에 없어도 아빠와 저희가 잘 지내길 바라셨어요. 그런데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저희가 다 크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아빠와 이런 유대감을 형성했는데, 아마 엄마가 보시면 믿을 수 없다고 하셨을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봐 왔는지요. 비록 우리는 당시의 슬픔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서로를 위해 그때 그곳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생리대를 한 박스를 사 놓으셨었어요. 우리가 언제 필요한지 모르셨거든요. 여자아이들이 겪게 될 것들, 필요하게 될 것들을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엄마이자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셨죠. 이 관계가 엄마가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놀라운 것이에요.

나혜인 PD: 소냐 님, 우울증과 불안감에 대해서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뒤돌아보면 이런 것들이 정신 건강 문제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슬픔이었던 것 같으세요?

소냐 님: 슬픔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 던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슬픔은 그 누구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왜냐면 오직 삶만이 그 슬픔을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요. 뭔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세상은 지루하고 모든 것이 똑같아요.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집에 왔을 때 집에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같은 소파에 같은 가구, 모든 것이 똑같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바뀌었거든요. 그런 마음의 구멍…공허함…이런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사와 인정을 받으려고도 노력했는데요. 왜냐면 그 공허함을 떨쳐내는 방법을 몰랐거든요. 정신 건강 문제는 분명히 알지 못했어요. 저희가 그것이 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극복하는 줄 알았다면 좀 더 쉬웠을 거예요. 그래도 저희는 운이 좋게도 서로가 있었죠.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말하는 것은 치유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나혜인 PD: 네. 두 분이 함께였기에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제 두 분은 똑같이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각각 두 명의 아들들을 두고 계시죠? 어머니가 되고 나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되시나요?

소냐 님: 네. 엄마가 자주 말씀하시곤 하셨죠. ‘너 엄마가 돼 봐”라고요. 엄마가 되면 이해할 거라고요. 그리고 결국 그런 시간이 왔죠. 전 엄마가 저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거봐, 말했지?’라고 하실 거라는 것을 알아요. 매일 그런 순간이 있어요. 어디를 가든, 아, ‘그게 그거였구나…’, ‘이게 엄마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거구나.’ 왜 엄마가 그렇게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 거예요. 엄마가 되고 나서요. 엄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하게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어요. 왜냐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아이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알려주기에 너무 짧은 시간만이 남았다는 것을 엄마는 알았으니까요. 이 모든 정보를 저희가 이제 다운로드받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어요. 엄마가 남겨둔 작은 선물이죠. 저희가 나이가 들수록 찾을 수 있는 많은 보석들을 엄마가 남겨뒀다고 저는 계속 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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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무덤을 방문한 재니스와 소냐 그리고 자녀들 Source: Supplied / Jayesslee
나혜인 PD: 재니스 씨는 어떠세요? 어머니의 날에 어떤 기분이 드세요?

재니스 님: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 중에 하나가 "너네가 운전면허 따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네가 결혼하는 것도 보고 싶고, 네 아이들도 보고 싶고” 이런 말이었어요. 그때는 우리랑 너무 관계없는 그런 일을 엄마가 말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제 운전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보니 왜 엄마가 이런 일들을 말했는지 알 것 같아요. 엄마는 이때가 우리가 가장 엄마를 원하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엄마를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일 거라는 것을요. 전 엄마가 이렇게 매우 앞서서 생각했다는 것이 참 고마워요. 엄마는 울지 않았어요. 이런 말을 할 때 슬프게 하지 않았어요. 매우 희망적으로 말했죠. 그러면서 절대로 화내지 말고 항상 받아들이고 우리를 위로하는 엄마처럼 늘 감사하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언제나 엄마를 생각하면 긍정적이 될 것 같아요. 엄마는 사랑과 긍정의 유산을 남기려고 노력하셨어요. 결국 우리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날이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고 공동체가 있고요. 그것이 바로 저희가 어머니의 날을 보내는 방식입니다.

나혜인 PD: 소냐 님과 재니스 님과 같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작별해야 하는 분들께는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으세요?

소냐 님: 네. 언제나 누군가가 엄마를 잃었다고 하면 즉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 수 있어요. 저희는 이제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농담을 수 있게 됐어요. 저희 둘은 이제 웃을 수 있으니 이제 치유되고 있다고 말했어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언젠가 여행을 하면서 2명의 낯선 소녀들과 방을 썼는데, 이 친구들도 엄마가 돌아가셨더라고요. 암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든, 삶에 영향을 미쳤죠. 그날 저희는 밤새 웃고, 웃으면서 2달러의 용돈을 받기 위해 어떻게 엄마의 가발을 빨았는지에 대해 얘기했어요. 이제는 웃을 수 있어요. 과거이고, 이런 모든 대화가 치유가 되기 때문이죠. 저희는 이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클럽을 만들었는데요. DMC 였어요. Dead Mum’s Club죽은 엄마의 모임이었죠. 만약 웃을 수 없다면 이 클럽에 들어올 준비가 안된 거예요. 이런 클럽을 만들기 전에도 저희가 아는 특정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는 커져갔어요. 어머니의 날에는 그냥 아무 말 없이 하트만 보내죠. 그것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요.

나혜인 PD: 앞으로 뮤지션으로 그리고 엄마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사나요?

소냐 님: 우리의 계획은요… Jayesslee의 2라운드를 계획하고 있어요. 저희가 겨울잠 속에서 깨어났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동면을 하면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어요. 다시 나가서 여행을 하고 투어를 하고 하는 것들이 먼 꿈같이 느껴졌죠. 매우 멀리 있는 꿈요. 왜냐면 주변에는 아이들이 기어다니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어요. 그렇지만 올해 저희는 첫 번째 해외 공연을 꿈꾸고 계획하고 있어요. 아빠와 아이들 등 우리 삶을 함께하는 온 가족을 데리고 가는 기회를 갖고 싶어요. 올해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과거에는 엄마인 것과 음악을 만드는 것을 직업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이제 다르게 생각하고 있어요.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깨달았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는 방법이고, 모든 것을 열정적인 프로젝트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용감할 수 있고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이죠. 다시 되돌아가고 꿈꾸고 희망하고 무섭더라도 그것을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지금이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엄마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라고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완전히 바뀌는 그런 순간이에요. 매우 기대됩니다.

나혜인 PD: 네. Jayesslee의 새로운 무대는 어떨지 너무 기대됩니다.

재니스 님: 감사합니다. 지켜봐 주세요.

나혜인 PD: 재니스, 소냐 님 고맙습니다. Jayesslee, 호주에서 가장 사랑받는 한국계 쌍둥이 자매, 어쿠스틱 듀오 오늘 가슴속 깊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날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소냐 님: 감사합니다. 모두 아름다운 어머니의 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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