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이름이 있습니다. 1950년대 전 세계 사람들을 로큰롤에 빠져들게 한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입니다. 스타는 사라졌지만 팬들의 가슴 속에 전설은 영원합니다. 살아있었다면 85세가 되었을 엘비스 프레슬리, 해마다 그의 생일인 (1935년) 1월 8일에 맞춰 전설을 추모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성대하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 축제 장소가 좀 의외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태어나고 활동한 미국이 아닌 호주, 그것도 시드니에서 350km 쯤 떨어진 뉴사우스웨일즈 서부의 파크스라는 지역 마을에서 축제가 열리는 건데요. 엘비스 프레슬리는 생전 파크스는 물론, 호주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파크스 지역에 엘비스 동상이 제막 되고 연 2만 5천 명 이상이 방문하는 대형 엘비스 리바이벌 축제가 열리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장식이 화려한 나팔바지부터 잔뜩 힘을 준 머리까지! 엘비스 프레슬리로 분장한 사람들이 시드니 센트럴 기차역으로 하나 둘 모여듭니다. 시드니 센트럴 역에서 '엘비스 익스프레스' 특급열차를 타고 ‘엘비스 페스티벌’이 열리는 뉴사우스웨일스의 파크스로 향하는 수 백명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들입니다. 매년 1월 둘째 주, 1월 8일을 전후해 센트럴 기차역에서 벌어지는 광경입니다. 세월이 흘러 팬들 대부분이 배 나온 중년과 백발의 노년에 이르렀지만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이들의 열정 만은 엘비스와 함께 청춘입니다. 시드니 센트럴 역을 출발해 파크스 도착까지 6시간 동안 열차 안에선 즉석 공연이 펼쳐집니다.뉴사우스웨일즈 중서부에 위치한 소도시 파크스는 엘비스의 생일인 1월 8일을 전후로 호주는 물론 전 세계에서 모여든 2만5천여 엘비스(Elvis Aaron Presley) 팬들로 북적입니다. 이 지역 전체 인구가 1만 명을 조금 넘는 것을 감안하면, 축제가 펼쳐지는 5일 동안 이곳의 인구는 두 배 이상 늘어나는 것이죠. 올해로 28년 전통을 자랑하는 ‘파크스 엘비스 페스티벌 2020은 1월 8일부터 12일까지 성대히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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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스 마을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축제가 시작된 건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혈 팬인 밥과 앤(Bob Steel, Anne Steel)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들 부부는 1981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대저택인 그레이스랜드에서 이름을 따와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레스토랑 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들을 걸어 놓고 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틀어 놨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사랑하는 단골들의 아지트가 된 그레이스랜드. 하루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인 단골손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테마의 생일파티를 열었는데 그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수많은 손님들이 노래에 맞춰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다리와 엉덩이를 흔들며 로큰롤 파티를 즐겼던 겁니다.
이를 계기로, 밥과 앤 부부는 지역 사회 전체가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키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고, 마을 사람들과 축제를 계획해 199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일인 1월 8일의 가장 가까운 주말에 첫 ‘파크스 엘비스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이 날 약 200명의 팬들이 모여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화 감상, 콘서트, 코스플레이를 즐기며 대성공을 이뤘습니다.
이후 파크스 마을의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엘비스 페스티벌’은 해를 거듭하며 입소문으로 퍼져 나갔고, 축제의 규모도 점점 커져 이제는 지역 주말 축제에서 5일 동안 치르는 대형 축제로 거듭났습니다. 호주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관광객들이 즐겨 방문하는 세계 유명 축제의 하나가 됐습니다. 1993년 축제의 주춧돌이 된 레스토랑 ‘그레이스랜드'는 호텔 그레이스랜드로 발전했습니다.‘Parkes Elvis Festival’은 이곳 쿡 파크(Cooke Park)의 메인 무대를 중심으로 이벤트 기간 내내 다채로운 공연이 이어집니다. 엘비스 및 1950년대 의상을 갖춘 이들이 함께 하는 거리 퍼레이드, 엘비스 관련 전시회, 유명 가수의 특별 무대, 엘비스 시대의 자동차들을 모아 놓은 전시회, 여기에 엘비스의 아내 프리실라 뷸리우(Priscilla Beaulieu) 를 닮은 여성 선발대회, 엘비스와 가장 닮은 사람을 선발하는 엘비스 컴페티션(Elvis Competition) 등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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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엘비스 컴프티션 우승자는 엘비스가 성장한 미국 멤피스(테네시 주)에서 ‘Elvis Week’에 개최되는 ‘Ultimate Elvis Tribute Artist Contest’에 출전하게 됩니다. 즉 외모나 음악 퍼퍼먼스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엘비스 프레슬리 다운 아티스트를 가려내는 최종 결선에 진출합니다. 이 밖에도 행사 기간 내내 파크스 거리는 엘비스 노래를 선보이는 무명 가수들의 버스킹(busking)과 함께 각종 프로그램이 펼쳐집니다.
엘비스는 외아들로 태어나 내성적이지만 지극한 효자였습니다. 선 레코드사와의 인연도 어려운 형편에서 자신을 위해 고생한 어머니께 뭘 해 드릴지 늘 고민해 오던 차에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자신의 노래가 담긴 음반을 드리기 위해 찾아갔던 작은 간이 스튜디오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그로서는 거금 4달러를 내고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가 나타나기 전 미국을 인종별로 나누어 놓았던 두 음악인 흑인음악 리듬 앤 블루스와 백인음악 컨트리를 목소리 하나로 융합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노래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공감을 자아냅니다.
엘비스의 보컬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이 있습니다. '워낙 가진 소리가 좋은데다 도무지 흉내가 불가능한 그만의 바이브레이션이 더해져 풍요로운 맛을 전해주는 그의 목소리는 2차대전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해 자유진영 최강국이 된 미국의 국력신장 그래프와 닮았다'는 것. 단적으로 엘비스의 풍부한 보이스처럼 미국도 경제적으로 풍성한 나라가 됐다는 분석입니다.
엘비스는 노래 부르면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허리 놀림이 하도 요란해 골반이란 뜻의 ‘펠비스(pelvis)’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요. 그가 무명에서 전국적 스타로 치솟은 1956년에 TV 프로 < 에드 설리번 쇼 >에 출연할 때 시청자의 반감이 두려워 카메라가 그의 허리 아래를 비추지 않은 사건은 전설적 에피소드로 남아 있습니다.
한 시대 세상을 뒤흔들었던 로큰롤의 황제는 1977년 8월 16일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유산은 여전히 지구촌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1993년 작은 지역 축제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페스티벌로 성장한 호주의 ‘파크스 엘비스 페스티벌(Parkes Elvis Festival)’의 역사와 이모저모를 엘비스 프레슬의 불후의 명곡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컬처 오디세이 유화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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